[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 (2) - 일제강점기 서울 노동사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남산 위에서 본 서울의 모습이다.

일본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 진압을 핑계로 대규모 군대를 용산에 주둔시킨 뒤 조선의 갖가지 이권을 빼앗아 철도부설, 부두하역, 광산채굴, 벌목을 시작했다. 일본은 1912~1918년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농지 40%를 강탈했다. 땅을 뺏긴 많은 농민들이 광산이나 부두, 철도작업장으로 몰려 노동자가 됐다.

노동자가 3.1운동 전국에 파급

3.1운동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1910~1917년 한해 고작 7~8건이던 노동쟁의가 1918년엔 50건에 달했고 파업 노동자도 4,500명으로 늘어났다. 조선 노동자들이 1918년이 되면서 식민지 착취에 저항을 본격화했다. 그 힘이 3.1운동을 낳았다.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시작은 지식인들이 주도했지만 거리의 폭발적 항쟁은 노동자 농민이 주도해 1919년 8월에 정점에 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만 84건, 8,500명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가장 먼저 만세시위에 합류한 이들은 용산인쇄소 노동자들이었다. 용산인쇄소는 용산전자상가 앞 원효로2가 사거리에서 있는 용문시장에 있었다. 용산인쇄소는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각종 문서와 책자를 생산하는 공기업이었다.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명은 1919년 3월 8일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거리시위를 벌이다 출동한 헌병대에 19명이 연행됐다.

다음날 아침 경성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명은 파업과 동시에 만세시위에 나섰다. 동아연초공장은 종로4가 사거리에 있었다. 동아연초도 조선총독부 직영 전매품인 담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이 역시 공기업이었다. 이날엔 전차 기관사와 차장들도 파업에 나섰다.


▲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명이 1919년 3월 8일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사진은 용산인쇄소 자리에 들어선 용문시장. 용산전자상가 앞 원효로2가 사거리 근처다. Ⓒ 독립기념관

1919년에 ‘8시간 노동제’ 요구 내걸어

지식인들 만세시위는 금세 시들었지만 노동자 투쟁은 1919년 7, 8월 최고조에 달했다. 8월 한 달에만 경성에서 26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특히 8월 18일 경성전기 파업은 경성시내를 암흑천지로 만들고 전차운행까지 중단시키는 위력을 떨쳤다. 앞서 3월 만세시위에 동참했던 동아연초 노동자들은 그해 10월 일당 20전 인상, 수당 50% 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 상여금 인상을 내걸고 17일간 파업한 끝에 승리했다. 이 파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8시간 노동제’를 내건 파업이었다.


▲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500여명은 1919년 3월 9일 아침 파업과 동시에 만세시위에 합류했다.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담배를 만들던 동아연초공장은 서울 종로구 인의동 112-2번지에 있었다. 시위가 격렬했던 종로4가 사거리에서 종묘 입구 쪽이다. Ⓒ 독립기념관

1920년 세계적 불황과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식민지 조선에도 실업자가 속출하고 곳곳에서 임금 삭감이 강행됐다. 1920년엔 콜레라가 서울을 강타해 983명이 죽어 노동자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시기 노동자들은 조직적 움직임을 보였다.

노동공제회 ‘성동소비조합’ 노동자 지원

1920년 4월 678명의 노동자가 서울에 모여 ‘조선노동공제회’를 만들었다. 여기엔 서울시내 지게꾼, 인력거꾼, 물장사, 나무장사, 엿장사, 신문배달, 연초직공, 인쇄직공이 참가했다. 공제회는 1921년 7월 성동소비조합을 열어 쌀과 일용잡화를 도매가로 팔아 소매상인의 중간착취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했다.

공제회는 내부분열로 1922년 10월 ‘조선노동연맹회’가 새로 결정됐다. 1923년 7월엔 서울 동대문 밖 4개 고무공장 여성노동자 1,200여명이 공동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엔 조선노동연맹회가 적극 연대했다. 여성노동자들은 2주간 완강하게 싸워서 이겼다. 연맹회도 분열돼 1924년 4월에 전국 노동단체가 모인 ‘조선노농총동맹’이 만들어졌다.

당시 신문기사로 1920년대 서울 노동자들 삶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의 제화공 정룡식은 “서울시내 제화공은 2~3일에 구두 한 켤레씩 만들면서 일당 470전을 받아 겨우 살아가는데 일당을 40전씩이나 삭감하면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이냐”고 울부짖었다.(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

서울의 봉제공 김모 씨(38)는 아내(31)와 노모(68)와 아들(12)과 함께 살았다. 김씨의 한 달 수입은 12원이다. 김씨 가족의 기초적 한 달 생활비만 합쳐도 10원 16전이었다. 한 달 벌어 의식주 해결도 빠듯했다.(동아일보 1924년 5월 16일)

봉제나 방적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살았다. 기숙사는 잠자는 곳 옆에 변기를 놓고 종이 한 장으로 막아 조잡했다. 기숙사에 사는 여성 노동자들은 기관지염과 폐병도 심했고, 여성병도 많았다.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토지를 뺏긴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주거난도 심각했다. 집 없이 거리에서 자다가 죽은 사람도 1915년 1,740명에서 1920년 2,147명, 1925년 3,441명으로 늘었다.

소월 시에 드러난 20년대 서울 노동

서정시인 김소월은 1920년 12월에 쓴 초기 시 <서울의 거리>에서 이런 식민지 서울의 허구를 민감하게 포착했다. “이리저리 찢어진 서울의 거리, 창백(蒼白)색의 서울의 거리, 소리 없이 울어라, (중략) 사흘이나 굶은 거지는, 스러질 듯한 애닮은 목소리로, ‘나리마님, 적선합쇼, 적선합쇼” 김소월은 식민지 근대화가 바꿔놓은 서울 풍경에 주목하면서 이면에 자리잡은 노동자 서민의 고통을 환기했다.

광희문 밖 경성고무 등 4개 공장 여성노동자 150명으로 구성된 경성고무여직공조합은 1923년 7월 3일 임금삭감 반대와 폭력 관리자 파면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회사의 해고 위협에 맞서 공장 앞에서 모두 단식농성에 들어가 7월 19일 회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경성고무 여성노동자들은 일제 말기까지 노동자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했다.

2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생지옥을 겪었다. “직공들이 공장에서 점심을 먹던 중 여직공이 아이를 안고 물을 먹으러 가다가 아이의 손이 우연히 일본인 감독의 얼굴에 닿았다. 이 감독은 주먹으로 어린 아이의 뺨을 때렸고 여직공이 이에 항의하자 감독은 여공을 발로 차고 때렸다. 다른 직공 4~5명이 감독에게 항의하자 감독은 ‘조선 계집 다 죽여도 상관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폭력을 가해 다수의 여공이 부상을 당했다”(동아일보 1926년. 11월 13일자)

태평양전쟁, 활발했던 노동을 잠재워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일제가 1930년대 조선을 병참기지로 활용하면서 노동자도 급속히 늘었다. 조선의 노동자는 1934년 처음 100만명을 넘었다.(102만 3,191명) 이 가운데 일용직이 89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90% 가까이가 비정규직이었다. 여기에 취업 노동자보다 더 많은 실업자(141만명)가 있었다. 노동자는 남여차별에 국적차별까지 당했다. 1934년 하루 일당은 일본인 남자 1원 94전, 일본인 여성 94전, 조선인 남자 90전, 조선인 여성 55전 순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도 노동자들의 싸움을 계속됐다. 노동자 파업은 1930년 160건, 1931년 201건, 1932년 152건, 1933년 176건, 1934년 199건으로 상당히 늘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0년대 조선을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하면서 더욱 폭력으로 통치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준비하면 1935년부터 모든 노동쟁의를 불법화했다. 그런데도 1937~1940년까지 4년간 430건의 파업이 일어났다.

1940년대 이 땅의 노동자들은 강제징용에 시달렸다. 강제 징용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면서 시작됐다. 일제는 1939년 이 법에 근거해 탄광 등 5대 산업에 8만 5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할당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에 사람과 물자를 조선에서 빼내 태평양전쟁의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이렇듯 조선은 1940년대 들어 노동의 암흑기를 보내다 해방을 맞았다.

<다음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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