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100년, 거대도시 서울에서 노동흔적 찾기](5)21세기와 서울노동


1. 도시의 엔진은 ‘노동’
2. 일제강점기 서울노동사
3. 해방전후 폭발과 오랜 침묵
√ 4. 조국근대화와 서울노동
√ 5. 21세기와 서울노동

3저 호황과 민주노조의 활기

1980년대 한국은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달러)으로 수출이 크게 늘었다. 저금리·低(저)달러는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정책의 결과였다. 미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기 침체기에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계속되자 레이거노믹스 정책을 폈다. 정부 지출과 소득세를 줄이고 고금리 정책 유지했다. 그 결과 재정 수지 불균형이 심화되고 고금리는 오히려 무역수지 적자를 가져 왔다. 한국의 저금리·저달러 현상은 레이거노믹스 정책실패의 결과물이었다. 저유가는 세계적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동 산유국들이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유가를 하락시키면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국과 대만 등 신흥공업국은 수출이 늘어 대규모 호황을 맞았다.

바로 이 시기 60~70년대 내내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노조민주화 운동의 여세를 몰아 상당수 민주노조가 자리를 잡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서울에선 공장이 밀집했던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셌다.

85년 정부는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5.2%로 정했지만, 몇몇 민주노조들은 이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 옆 인천 부평공단의 대우자동차가 4월에 이미 16.4%의 임금인상을 따내 정부 가이드라인을 넘어섰다. 이후 효성물산 26.5%, 대우어패럴 18.5% 영창악기 17%, 제진전자 15.5%, 가리봉전자 17.5% 롬코리아 17.5% 남성전기 17.6% 등 대폭 임금인상에 노사가 합의해 정부와 경총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을 무력화시켰다.

85년 구로동맹파업과 21세기 이주노동자

1985년 봄 대우어패럴 임금인상 합의 이후 이를 주도했던 노조간부 3명이 구속됐다. 옆 공장 노조간부의 구속을 접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 3개 회사 노조가 1985년 6월 24일부터 연대파업에 들어갔다. 앞서 4월의 대우자동차가 외부와 연대 없이 공장 안 파업에 머물렀던 것과 대비된다. 전자와 섬유산업이란 업종을 넘어 연대파업을 벌였다.


마리오아울렛 벽면엔 지금도 19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 현장을 알리는 동판이 붙어 있다.(오른쪽)
그 옆은 ‘금천 순이의 집’이란 이름으로 전시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다.

연대파업의 결과는 혹독했다. 근처의 민주노조는 모두 해산되고 조합원들이 흩어져 성과보다는 피해가 많았다. 구로공단은 80~90년대를 거치며 공장들이 안양, 시흥, 반월, 시화로 대거 지방이전하면서 잠시 소강기를 가진다. 그 사이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동포들이 집값 싼 이곳 가리봉동으로 몰려 들었다.

21세기 들어 한국엔 200만 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들어왔고, 이들 중 50만명 이상이 중국 국적을 가졌다. 민족 구성으로 보면 한족과 조선족, 탈북자로 나뉘지만 국적은 모두 중국이다. 서울에 자리잡은 중국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은 가리봉동엔 독신으로, 대림동엔 가족 단위 전월세로 산다.

하위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순혈주의가 이들을 내내 괴롭히고 있다. 최근 영화 <청년경찰>이 가리봉동 중국동포타운을 ‘중국인 조폭 우범지대 1호’로 그려 사회문제가 됐다. 영화는 2007년 4월 가리봉동 ‘연변흑사파’ 검거를 배경으로 했다. 서울청 광역수사대가 흑사파가 위험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초기에 제압한 기획수사였는데, 경찰이 다소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린 측면도 있다.

사실은 그물총을 동원한 짐승 다루듯 단속하는 반인권적 정부정책 때문에 이들은 30년전 여공들이 살았던 가리봉동 2~4평 ‘벌집’에서 숨죽이며 살았다. 낮에는 단속을 피해 은둔했다가 밤에 잠시 나가 노래방 가는 게 유일한 노락이다. 그래서 가리봉동엔 노래방이 많다. 2005년 동포귀국지원 프로그램과 2007년 방문취업제도 시행으로 다소 안정을 찾고 있다. 그러나 가리봉 재개발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이들의 삶도 위태롭다.

서울을 비껴 간 87년 노동자대투쟁

87년 봄 서울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6월 항쟁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해 7월부터 시작돼 석달 동안 3,311건의 노동쟁의를 낳았던 노동자대투쟁에서 서울은 중심적 지위를 내려놓았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울산과 마창 등 한반도 동남권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런 지리적 특성 외에도 반세기 동안 노동자 목소리를 대변해온 여성의 후퇴와 남성의 등장도 낳았다.

당시 10인 이상 사업체 상용근로자 333만명의 37%인 122만명이 참여한 노동자대투쟁은 87년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에서 시작됐다. 대투쟁의 특징은 중공업 대공장 남성노동자가 주죽이었고, 경제적 요구 외 작업장 민주화 요구도 광범하게 표출됐고, 작업거부 농성 시위 등 다양한 투쟁방법을 택했다.

이 시기 서울지역은 87년 7월 22일 구로공단 ㈜태봉전자(구로구 독산동)와 영송정기 노조결성 뒤 잠복기를 거쳐 8월 13일 OB맥주 영등포공장과 금성오디오 농성으로 전면 확산됐다. 노동자대투쟁의 힘으로 45개 노조가 이듬해 5월 29일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을 결성했다.

기업주에 부끄러움 지워 준 IMF

한국은 일본을 따라 ‘가족주의 경영’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사장은 늘 직원들에게 “우리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며 ‘평생직장’의 신화를 쌓아 갔다. 97년 IMF 이전 한국의 기업주들은 불가피하게 직원을 해고하면 몹시도 부끄러워했다. 직원을 해고한 기업주는 그들 사회에서도 제 식구들도 못 챙기는 무능한 사장이라고 손가락질 당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은 이런 기업주들에게 부끄러움을 지워줬다.

위기는 서울에서 먼 곳에서부터 찾아왔다. 1996년 가을 한국 최초의 구조조정은 울산에 있던 섬유회사 ‘선경인더스트리’에서 일어났다. 이 회사는 96년 9월 전사원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제를 실시했다. 여기서부터 ‘명퇴’, ‘구조조정’이란 단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당시 선경인더스트리는 7년 이상 근속자 및 35세 이상 사원들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접수받았다. 명퇴 조건도 지금처럼 가혹하지 않았다. 퇴직금 외에 연령과 근속연수에 따라 최고 60개월분의 퇴직 장려금과 퇴사 후 2년간 자녀장학금, 경조금, 각종 기념품 등을 받고 회사 운영하는 창업지원실에서 도움도 받았다.

1998년 혹독한 구조조정에 나선 제일은행 홍보부가 만든 <눈물의 비디오>엔 은행장부터 시작해 남은 직원도, 쫓겨나는 직원도 모두 “제일가족 여러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드시 흑자경영을 만들어 떠나는 직원들을 다시 고용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기업주들은 떠난 직원을 재고용하기는커녕 더 많이 해고하는 기업주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거대소비도시 서울, 서비스업 90% 육박

서울 도심의 제조업이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그나마 남은 제조업은 아파트형 공장으로 숨어들었다. 이제 서울은 생산보다는 소비중심의 거대도시가 됐다. 지난해 서울의 1인당 연간 총소득은 10.9% 증가했는데, 1인당 민간소비는 14.3%나 증가해 거대소비도시가 됐다. 소비도시에 걸맞게 21세기 서울의 노동은 서비스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절대다수가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2011년 서울시 서비스업 종사자 수는 450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85.6%가 여기서 일한다. 서울시 서비스업 종사자 비중은 2000년 77.1%에서 2011년 85.6%로 크게 확대됐다. 반면 같은 기간 제조업 종사자 비중은 9.8%P 줄었다.

본사가 직접고용하지 않고 다단계 하청으로 고용하는 간접고용도 크게 늘었다. 300인 이상 사업주의 간접고용 비율을 나타내는 고용형태공시에서 지난해 전국의 간접고용 비율은 18.1%였는데, 서울은 이보다 높은 19.7%를 기록했다.

간접고용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프랜차이즈도 서울이 가장 활발하다. 특히 알바 일자리가 풍부한 서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는 알바들이 선망하는 ‘명당’이다. 서울시가 발표한 ‘2016년 2분기 아르바이트 실태조사’를 보면 강남 3구는 25개 자치구별 채용 공고 표본의 30%가량을 차지할 만큼 일자리 수요가 많았다. 시급도 6,850원으로 서울 전체 평균(6,718원)보다 높았다.


대표적 서비스업의 하나인 청소노동자들은 후미진 공간에 숨어서 쉴 수밖에 없다.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

높은 물가와 주거비 등을 고려하면 서울의 노동자 임금은 결코 높은 게 아니다.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겪는 정신적 피로도 상당하다. 서초동 법원 근처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모(22) 씨는 “고향인 울산보다 시급은 겨우 200원 더 주는데 반해 고객들의 요구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일이 끝나면 매번 파김치가 된다”고 말했다. 부유층이 밀집한 지역 특성상 발레파킹처럼 위험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청담동 한 음식점의 발레파킹 기사 김모(43) 씨는 “대부분 고급 외제차들이 드나드는데 사고 나면 업체가 80% 정도 부담하고 알바생도 20% 책임지기에 항상 신경을 곤두선다”고 했다. 고객 차량의 주차단속을 막기 위해 번호판을 가리는 편법을 쓰다가 형사 입건되는 경우도 있다.

서비스업에 매몰된 서울노동의 현주소를 반영하듯 이런 저런 노동 상담도 서비스업이 가장 많은 강남3구에 집중돼 있다. 2015년 서울노동권익센터 전체 노동상담 2,184건 중 강남3구가 21.2%나 차지했다.

지하로 숨겨나 하늘로 올라가는 노동

서울시 서비스업의 약 50%는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이다. 두 업종은 대표적인 저임금 사업장이다.

대표적인 서비스업종의 하나인 청소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은 화려한 빌딩에서 일하지만 근무복을 입는 순간부터 유령이 된다. 있지만 없는 사람처럼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덕분에 남자 화장실에 여성노동자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일해도 되는 희한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청소노동자들은 전기배선이 지나가는 지하의 좁은 공간에 앉아 밥을 먹거나 화장실 한켠에서 식사를 해결해야만 한다. 청소노동자들은 체력단련실이 딸린 정규직들의 샤워시설을 이용할 수도 없다. 환경미화원들은 여름 내내 땀냄새 나는 근무복을 갈아입을 탈의실이 없어 그대로 퇴근할 때 가장 서럽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의 문제제기로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됐지만, 정규직과 이동시간이 분리돼 있고, 대부분 하루 중 점심시간 외엔 이용할 수 없다.

21세기 서울노동은 이렇게 지하로 숨어 은폐됐다. 노동 자체가 감추고 싶은 무엇이 됐다. 이렇게 송곳 하나 꽂을 공간이 없다보니 분노한 노동자들은 고공으로 올라간다. 빌딩 숲에 갇힌 노동자가 그나마 존재감을 드러낼 곳은 고공농성 밖에 없다.

고공농성의 시간도 점차 길어지고 있다. 대공황기 임금삭감에 항의하러 1931년 5월 29일 평양 을밀대로 올라갔던 강주룡은 8시간 만에 내려왔는데,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선 김진숙 씨는 308일 만에 땅을 밟았다.

파견노동자였던 구로공단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2000일을 싸운 뒤에 겨우 합의에 이르렀다.


기륭전자 노동자 2명이 2008년 5월 26일 구로디지털단지역 앞 CCTV탑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참세상

21세기 초반 10년 동안 유령처럼 숨어있던 노동자들이 20세기와 다른 방법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노조는 안된다고 했던 삼성에도 삼성전자서비스센터 기사 700여 명이 수년째 뭉쳐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30대 파리바게뜨 청년 제빵기사들도 노조를 만들어 간접고용에 항의하고 있다.

이들은 21세기에 맞게 온라인으로 소통한다. 이들에게 SNS는 강력한 무기다. 삼성전자서비스기사들은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카톡으로 신고한다. 이들은 온라인 소통으로 파편화된 자기 노동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난 100년 동안 서울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의 역사이야기를 5회에 걸쳐 나누었습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인 ‘노동하는 우리’에 대한 자부심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울노동100년역사」는 서울노동권익센터 홈페이지 ‘온라인교육’ 메뉴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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